
<먼작귀 전편 감상 후기>
귀여운 캐릭터들이 나오긴 하지만, 세계관은 베르세르크, 다크 소울에 버금가는 잔혹함과 암울함을 자랑한다. 드글거리는 무서운 괴물들, 마녀와 도깨비, 영혼을 뒤바꾸는 주술과 저주받은 장비들, 노동 시장에서 토벌이나 제초로 생계를 이어가는 이들…
째깐이들은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어떻게 그렇게 낙천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거지?!
정리되기 전의 말과 옮겨 적은 문장.

<먼작귀 전편 감상 후기>
귀여운 캐릭터들이 나오긴 하지만, 세계관은 베르세르크, 다크 소울에 버금가는 잔혹함과 암울함을 자랑한다. 드글거리는 무서운 괴물들, 마녀와 도깨비, 영혼을 뒤바꾸는 주술과 저주받은 장비들, 노동 시장에서 토벌이나 제초로 생계를 이어가는 이들…
째깐이들은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어떻게 그렇게 낙천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거지?!
그대의 하늘이 언제나 맑기를, 그대의 사랑스러운 미소가 언제나 밝고 구김 없기를, 한없이 기쁘고 행복한 순간에 그대에게 축복이 넘치기를, 그대는 어떤 이의 외로운 가슴에 기쁨과 행복의 순간을 안겨 주어 감사한 마음을 가득 품게 했으니!
그래! 한순간이었던 지극한 행복이여! 한 사람의 일생에서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은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백야』
제목을 『학』이라 했다. 천재의 탄생부터 그 비극적인 말로까지를 다룬 장편 소설이었다. 그는 이처럼 자신의 운명을 자신의 작품에서 예언하는 것을 좋아했다. 첫머리에 애를 먹었다. 이렇게 썼다. — 남자가 있었다. 네 살 때, 그의 마음속에 야성을 띤 학이 깃들였다. 학은 열광적으로 거만했다 운운.
전, 학자도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 정도 쓰는 데에도 엄청 생각했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연습한걸요. 당신이 좋은 새해 첫 꿈을 꾸고 첫 해돋이를 보시고 좀 더 좀 더 살아가는 자신감을 가지시길 기도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려 드리고 싶어 열심히 썼습니다.
사람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헤르만과 도로테아』도 『들오리』도 『태풍』도, 모두 그 작가의 만년에 쓰인 것이라 합니다. 사람들에게 휴식을 선사하고 광명을 던져 줄 수 있는 작품을 쓰려면 재능만으로는 안 되는 모양입니다. 만약 당신이 앞으로 십 년 이십 년, 이 밉살스런 세상에 어떡하든지 횃불로 끝까지 살아남아 다시 한번 잊지 않고 저를 불러 주신다면, 저는 얼마나 기쁠까요? 틀림없이, 틀림없이 올게요. 약속해요. 안녕.
다자이 오사무, 「원숭이 얼굴을 한 젊은이」, 『만년』
학교에서 쓴 내 작문도 죄다 엉터리였다고 할 수 있다. 나는 나 자신을 얌전하고 착한 아이로 지어내 쓰려고 노력했다. 그러면 언제나 모두에게 갈채를 받는다. 심지어 표절도 했다. 당시 걸작이라며 선생님들이 치켜세운 「동생의 그림자놀이」는 어떤 소년 잡지의 1등 당선작이었던 것을, 내가 고스란히 훔친 거였다. 선생님은 내게 그걸 붓으로 정서해서 전람회에 내도록 했다. 나중에 책을 좋아하는 한 친구에게 이 일이 탄로 났을 때, 나는 그 친구가 죽기를 바랐다.
나는 지고 있는 꽃잎이었다. 약간의 바람에도 파르르 떨었다. 타인으로부터 아무리 사소한 멸시를 받아도 죽을 듯이 괴로웠다. 나는 내가 머지않아 꼭 훌륭한 사람이 될 거라고 생각했고, 영웅으로서 명예를 지켜 가령 어른이 얕보는 것조차 용서할 수 없었으므로, 이 낙제라는 불명예도 그만큼 치명적이었다.
그런데 그 무렵 나는 어느 러시아 작가의 유명한 장편 소설을 읽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소설은 한 여자 죄수의 과거 이야기로 시작되었는데, 그 여자가 불행해지는 첫걸음은 그녀 주인의 조카인 귀족 대학생의 유혹을 받은 데서 시작되었다. 나는 그 소설에서 훨씬 중요한 감상을 잊은 채, 두 사람이 흐드러지게 핀 라일락꽃 아래서 첫 입맞춤을 나눈 페이지에 내 마른 잎 서표를 끼워 두었다. 나 역시 빼어난 소설을 남의 일인 양 읽을 수 없었다. 나는 그 두 사람이 미요와 나를 닮았다는 느낌이 자꾸만 들었다. 내가 조금만 더 모든 일에 뻔뻔스러워진다면, 마침내 이 귀족과 빼닮을 수 있게 돼, 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겁 많은 내가 허무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런 좀스러운 기질이 내 과거를 너무나 평탄하게 만들고 말았다고 생각했다. 나 자신이 인생의 빛나는 수난자가 되고 싶었다.
다자이 오사무, 「추억」, 『만년』
죽을 생각이었다. 올해 설날, 옷감을 한 필 받았다. 새해 선물이었다. 천은 삼베였다. 회색 줄무늬가 촘촘히 박혀 있었다. 여름에 입는 옷이리라. 여름까지 살아있자고 생각했다.
그녀는 포장마차를 나와 전차 정류장으로 가는 도중, 시들시들한 나쁜 꽃을 세 사람에게 건넨 걸 아프도록 후회했다. 느닷없이 길가에 쭈그리고 앉았다. 가슴에 십자를 긋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격렬하게 기도하기 시작했다. 마지막에 일본어 두 마디를 속삭였다. “피어라. 피어라.”
다자이 오사무, 「잎」, 『만년』
요컨대, 서로가 어른이 된 것이리라. 어른이라는 건 쓸쓸한 법이다. 서로 사랑하면서도 조심하느라, 남남처럼 서먹서먹함을 떨치지 못한다. 어째서, 그리 조심스러워야만 하는 걸까? 그 답은 별거 아니다. 멋들어지게 배신당하고, 된통 창피를 당한 적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믿을 게 못 된다, 라는 발견은, 청년이 어른으로 이행하는 제 1과다. 어른이란, 배신당한 청년의 모습이다.
다자이 오사무, 『쓰가루』
그런데 하늘나라의 관점, 하느님의 관점에서 보면 과연 어떨까? 모범적인 삶의 질서와 규율, 세속적 욕망과 감각적 쾌락의 단념, 더러운 일과 피 묻히는 일을 멀리하고 철학과 기도에만 몰입하는 것이 과연 진정으로 골드문트의 삶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있을까? 인간이란 존재는 정말 정해진 규칙대로 살아가게 되어 있는 것일까? 인간의 시간과 운명이 예배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처럼 그렇게 정해져 있는 것일까?
헤르만 헤세,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꿈의 절반은 그저 꿈으로 끝나는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