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와 함께한 6개월, 26년 상반기 회고

예전에는 유희왕 신팩 소식, 쿠키런 다음 정기 업데이트 그리고 침착맨 유튜브 업로드 등등 기다리는 것들이 많았는데 요즘은 AI 프런티어 랩에서 새로운 모델 출시하는 날만 목 빠져라 기다리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것들을 다 제쳐두고서 AI만 붙들고 있는 것은 ‘신기하다’와 ‘두렵다’라는 감정을 크게 자극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25년도에는 Cursor의 가장 기본 옵션인 20불짜리 구독을 1년 내내 업무에 활용했습니다. 간간히 ChatGPT도 써주고. 20불 옵션이 제공하는 사용한도가 그리 많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게 부족하지는 않았습니다. 웬만한 것들은 사람인 제가 직접 맥락을 파악하고 기획/설계를 했고, 구현 단계에서 변수명 정하기 또는 간단한 함수 구현 그리고 디버깅에 필요한 로그줄 추가 정도만 AI에게 지시를 했었습니다. 그보다 복잡한 작업들을 믿고 맡길만한 수준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다 생각이 바뀌게 된 것은 25년 12월 중순. 4주 이상 걸릴 것으로 예상되는 큰 태스크를 혼자 맡아서 처리하는 과정에서 3주 차 정도 진행이 됐을 때. 기존 코드도 이미 너무 많고 테스트 코드로는 테스트할 수 없는 시나리오들이 많아서 리팩토링과 테스트에서 난항을 겪고 있었습니다.
뭐라도 도움 될만한 기능이 없을까 하고 찾아보다가 Cursor IDE의 사이드바에 있는 채팅 기능 하단 모델 선택창에서 Claude의 Opus4.5를 발견했습니다. 평소처럼 큰 기대 없이 로직 검증이나 디버깅 관련 도움 요청을 했는데, 아니 글쎄 애가 너무 똘똘해진 거 아니겠어요? 그리고 든 생각은, ‘처음부터 이거 썼으면 2주 컷 했을 수 있겠는데?’. 그렇게 20불 한도 다 써버리고, 60불로 업그레이드해서 그날로 다 써버리고, 200불 지를까 말까 고민하다가 미친 짓인 거 같아서 거기서 멈췄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Claude와 Claude Code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월에 임시로 리드 직책을 맡게 되면서 AI 성능 이렇게 좋으니까 우리도 업무에 지원해 달라고 대표님께 건의를 드렸고, 놀랍게도 법카로 AI를 무한으로 즐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게 모든 고통의 시작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처음에는 신기하고 어떻게 사용하면 좋을지 모르니, 하루 14시간 이상(업무 시간 포함) 앉아서 X(트위터)에서 AI 관련된 내용을 마구잡이로 뒤지며 AI 스킬이니 플러그인이니 콘텍스트 관리니 되는 대로 찾아보고 시도해 보고 그랬습니다. 그러다 보니 피드가 전부 AI 관련 내용으로 가득 차게 됐습니다. AI 사용해서 몇 천에서 몇 만 불 벌었다부터 시작해서, AI로 개인 비서 만들어서 에브리띵 오토메이션 했어요, AI로 second brain 만들면 아무튼 개쩐다, AI 와우 퍼킹 어썸맨~ 하는, AI FOMO로 가득 차게 만드는 글들만 계속 눈에 들어오니까 하루 종일 스크롤만 하게 되는 역병에 걸려버렸던 것입니다.
진짜로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결국 남은 것은 ‘딱히 아이디어는 없지만, 남들은 AI로 놀라운 결과물들을 만들어내는데 왜 나만 안 되지?’ 싶은 크나큰 상실감이었습니다.
그렇게 정신도 죽어가고 몸도 죽어가다가 3월 초, 임종 직전 회광반조하듯 정신이 번쩍 돌아왔습니다. 무엇이 계기였는지는 사실 정확히 기억나지 않습니다. 번아웃에 가까운 어떤 충격이었던 것 같고, ‘계속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가’라는 질문이 한동안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는 것만 기억납니다. 그리고 하나의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AI는 내가 아는 세계를 더 선명하게 볼 수 있게 도와주는 도구지, 내가 모르는 세계까지 단번에 확장시켜 줄 수는 없구나.’ 물론 AI가 세상 삼라만상을 이해하고 있을 수도 있지만(그리고 머지않아 그렇게 될지도 모르지만), 결국 내가 경험과 지식을 기반으로 검증할 수 없는 것들까지 AI가 어떻게 해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AI로 뭔가 그럴싸한 아이디어 없나 찾아봤지만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상황을 좀 그럴싸하게 포장해 본 것이기도 합니다.
물론 아직은 어떤 것도 정답이라고 할 수 없는 대혼돈의 시대입니다. 다수가 동시에 바라보고 있는 방향이 정답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따라가 보는 것도 나쁠 건 없죠. 근데 저처럼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것이 과연 올바른 것일까 하는 의문도 같이 듭니다.
예를 들어 이런 식입니다.
- 내가 사람 비서도 필요 없는데 AI 비서가 필요한가? → No. 슬랙 메시지나 이메일 정도는 내가 확인하면 된다.
- 범용 스킬이 떡칠된 유명한 플러그인이 내 도메인에 필요한가? → No. 스킬 정도는 직접 만들거나 필요한 것들만 가져와서 커스터마이징하면 된다.
이렇게 남들이 좋다더라 해서 다 해봐야 되는 건 아니니까, 나한테 맞는 옷을 찾아서 입는 것이 베스트라고 생각합니다.

그 뒤로 몇 달이 지난 지금도 업무에서는 Claude Code와 Codex를 병렬로 돌려가며 도구로써는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쓰고 있습니다. 다만 도구가 도구 밖으로 넘어와 제 하루를 잡아먹지 않도록, 너무 매몰되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는 연습을 하는 중입니다.
내가 아는 세계, 특히 개발이라는 세계는 이미 AI가 충분히 잘 다뤄줍니다. 사람 마음이 간사한 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의 나르치스처럼 그냥 내 세계에 머물러 있겠다고 다짐했는데, AI 때문에 상황이 반전되니 다른 길을 찾아 방황하게 되네요. 저는 이제 모르는 세계 쪽으로도 걸어가 보고 싶습니다. 게임으로 치면, 다른 이들이 남겨놓은 지식(공략)을 보고 목적지까지 최적 루트만 찍고 달리는 사람이 있고, 미니맵의 안개를 구석구석 걷어내며 다니는 사람이 있잖아요. 저는 후자가, 골드문트가 되고자 합니다. 최종 목적지가 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거기까지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사람이든 자연이든 책이든, 그냥 많은 것들을 알게 되고 사랑하고 싶습니다.
물론 당장 뭔가를 저지르고 보겠다는 것은 아니에요. 이전에는 개발만이 내가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되었는데, AI 덕분에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더 해볼 만하다는 느낌도 있습니다. 하지만 AI는 밤길을 밝히는 등불이 되어줄 수는 있어도, 내 마음의 등불이 될 수는 없습니다. 스스로를 등불 삼아 길을 찾아보려 합니다.